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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메이커][사람의 길]결혼이주이민여성 멘토 김희야

박옥화 0 2,014 2008.07.25 14:18

다르지만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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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눈으로 다문화 친구들을 보다 보면 나와 같지 않다는 생각으로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들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인데 말입니다. 다른 것이 당연합니다. 다문화 친구들은 나와 많이 다릅니다. 나는 상큼한 오렌지주스를 좋아하고, 그 친구들은 달콤한 망고주스를 좋아합니다. 베트남 쌀국수를 먹으러 가면 나는 멸치육수 낸 잔치국수가 생각나고, 그 친구들은 고국의 베트남 맛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다른 점들이 그들과 만나는 데 불편하거나 잘못된 행동이 아닙니다. 단지 선호하는 방향이 다르고 내가 살아온 환경과 생각이 다를 뿐입니다.
- 김희야 ‘쌀국수와 잔치국수’ 중에서


제 이름은 김희야입니다. 이름이 참 예쁘지요? 희야…. 기쁠 ‘희’자에 어조사 ‘야’자입니다. 아들 둘에 딸 하나 얻은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살면서 얼굴 예쁘다는 말은 잘 못 들었는데 이름 예쁘다는 말은 참 많이 들었습니다. 기쁘다!! 이름에 기쁠 ‘희’자가 들어가선지, 제가 이름값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주위 사람들은 저를 만나면 기쁘다 하네요. 물론 내가 먼저 기뻐야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기쁘게 할 수 있는 거겠지요.

저는 일산 사는 서른여섯 살의 평범한 주부입니다. 여섯 살 터울의 남편과는 스물두 살 때 결혼해(참 일찍도 했지요) 이제 주부 14년차에 중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4학년인 남자아이를 두고 있습니다. 남편은 건설과 관련한 조그마한 사업을 하고 있는데요, 아시죠? 요즘 건설 경기가 얼마나 좋은지는. 그래도 저는 요즘 기쁜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답니다. 일산종합사회복지관에서 시행하고 있는 결혼이주이민여성들을 위한 멘토링 정서결연사업에 멘토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이화여대 언어교육원에서 한국어교원 양성과정을 밟고 있기도 합니다.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제껏 세상을 바라보기만 했지 직접 뛰어들지 못했던 저로서는 봉사활동을 통해서 얻는 성취감이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너무 일찍 결혼해 주부가 되어버린 탓에 ‘김희야’ 자체로 산 기간이 너무도 짧기만 했습니다. 작년에 뒤늦게 방송통신대를 졸업한 것도 그런 ‘자아’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제 멘토로서 사회봉사활동에 나선 것도 그런 ‘자아’를 본격적으로 실현해나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겠지요. 더구나 그 일은 또 다른 ‘자아’를 이끌어주는 일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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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종합사회복지관의 결혼이주이민여성을 위한 한국어교실. 시급한 생활어 중심으로 가르치고 있다.

일산종합사회복지관은 고양시에서 위탁받아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지역사회복지기관입니다. 이곳에서는 2006년 11월부터 다문화가족 결혼이주이민여성들이 우리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멘토링 정서결연사업은 그중 한국어교실에 참여하고 있는 결혼이주이민여성들을 대상으로 한국인 멘토가 가까운 생활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돕는 일입니다. 2006년 두 번에 걸친 시댁 친척의 국제결혼을 지켜보면서 나 역시 다문화사회의 한 구성원임을 막연하게나마 실감했던 터에 다문화가족들을 돕는 일에 직접 나서게 된 것은 2007년 3월 일산종합사회복지관의 멘토링 봉사활동 공고를 보면서부터입니다.

멘토링 봉사활동이 주로 언어, 생활, 정서의 측면에서 이주여성들을 돕는 일이라 할 때 그 일은 전형적인 ‘옆집아줌마’ 스타일인 제게는 아주 적격인 일이었습니다. 한국말이야 기본이고, 생활력은 어디다 내놓아도 빠지지 않고, 게다가 인간성까지 괜찮은 저였으니까요. 그러나 막상 멘토로 나서 보니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왠지 모를 안쓰러움, 어줍지 않은 동정심 따위로는 어린 나이에 멀리 타국에서 세대와 문화 차이를 극복해가며 어려운 살림살이를 하고 있는 그들을 오히려 불편하고 초라하게 만들기 십상이었습니다. 멘토링 자원봉사를 하면서 ‘내가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라는 물음의 답은 결국 직접 무엇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분명 나와 다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만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보면 다른 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문화친구들과 나, 가장 큰 공통점은 20대에 결혼하여 한국인 남편과 한국에서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그들의 남편 나이는 십중팔구 제 남편 또래이기 십상입니다. 그 공통점만으로도 만나면 서로 할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언어의 장벽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의 장벽보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오는 장벽이 더 높습니다. 단지 한국말이 서투르고 한국 문화가 익숙하지 않을 뿐이지 그들이 나보다 ‘못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결혼이주여성들이 가장 먼저 부딪히는 것은 언어의 장벽입니다. 부부관계뿐 아니라 모든 관계가 대화를 통한 소통을 기본으로 한다고 볼 때 그만큼 그들이 겪는 언어의 장애는 절박합니다. 그 절박함은 한국어를 채 익히기도 전에 아기를 갖게 되면서 거의 공포로 변하게 됩니다. 그는 이미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라나는 자식의 문제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다문화가정 아이가 말이 늦더라’는 일반의 인식은 그들에게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현실입니다. 남편과 시댁에서조차 아이의 장래에 관한 문제라 하여 다그치기 일쑤입니다. 이쯤 되면 그들에게 한국말은 그야말로 ‘서바이벌 언어’가 됩니다.

그러나 이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지금은 중학교에 다니는 제 아들이 유치원 때의 일입니다. 유치원에서 뭘 배우고 왔는지 아들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엄마, 나는 커서 경차롼이 되고 싶어요. (엄마)경차롼이 뭐니? 경찰관! 그래야지. 해봐, 경찰관. (아들)결차란. (엄마)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 따라해봐. 경! (아들)경! (엄마)크게 따라해. 찰! (아들)찰! (엄마)관! (아들)관! (엄마)그래, 경찰관. (아들)결차란…. 벌써 8년 전의 이야기지만 그날 저는 여섯 살짜리 아들을 붙잡고 발음에 대해 열불나게 다그치느라 머리에선 모락모락 열이 피어오르고, 아들은 그만 울어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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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야씨의 멘티들. 미프엉(왼쪽, 한국명 권수빈·24)은 작년에, 보티녹화(23)는 현재 멘토링을 맡고 있다.

저희 아이들은 크면서 유난히 말이 늦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아빠 엄마, 병아리 삐약, 참새 짹짹…” 하며 별소리를 다하는 때 우리 아이들은 옹알인지 뭔지 엄마만 아는 암호 같은 몇 마디만 겨우 했고, 그조차 발음이 또박또박하지 않았습니다. 엄마 아빠 모두 외국물 구경도 안한 토종 한국인인데 아이들은 참 말이 늦게도 트였습니다. 그 조바심이 아이를 그토록 다그치게 했던 것입니다. 물론 지금 아이들은 생활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학교에서 발표를 잘해 반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이끈다고 칭찬을 받기도 한다는군요.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때 왜 나는 발음이 아니라 경찰관이 되고 싶어 하는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지 못했던 것일까요. 와! 정말 멋있는 생각을 했구나. 어쩜 그렇게 멋진 생각을 했을까? 경찰관 아저씨는 어떤 사람일까? 너는 어떤 경찰관이 되고 싶니? 우리 경찰관 아저씨 그려볼까? 그렇게 말하지 못했을까요. 이주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을 부끄러워하고 다그치기 전에 왜 그들의 마음을 알아주고, 더 나아가 그들의 말을 조금이라도 먼저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일까요. 한때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머리가 똑똑하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2개국의 어휘를 들으며 자란 아이는 언어적인 자극을 다른 아이들보다 2배로 받아서 풍부한 표현력과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것이지요.

제가 언어교육원을 다니며 새삼 한국어 교육과정을 밟고 있는 것도 그런 생각이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우리말을 우리 입장에서가 아니라 배우는 사람의 입장에서 배우면서 느낀 바도 참 많았습니다. 제가 멘토링 봉사활동을 하면서 맡았던 네 사람이 공교롭게도 모두 베트남 여성이었습니다. 그들은 중국계와 같은 한자문화권, 필리핀과 같은 영어문화권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큰 언어적 어려움을 겪습니다. 게다가 그중에는 한글교육을 받으면서 처음 연필을 잡아본 사람도 있습니다. 왜 갑자기 눈물이 나는 것인지. 저는 그 사람들의 마음을 압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야 제대로 공부가 하고 싶었던 저로서는 그 배움의 참맛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결혼이주자 독서모임 같은 것도 해보고 싶고, 이주민을 대상으로 한 야학 같은 것이 생긴다면-저는 꼭 그렇게 될 거라고 믿습니다. 결혼이주여성도 언젠가는 검정고시도 보고 하면서 저와 같이 자아발견에 목말라할 것이니까요-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선생이 되어 늙을 때까지 해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누가 압니까. 그렇게 배운 여성이 나중에 새로운 이주여성의 멘토가 되어줄지요.

복지관에 나오는 결혼이주여성 중에 일본인 친구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못에 찔려 손이 퉁퉁 부었습니다. 주변에서 깜짝 놀라 빨리 병원에 가자고 했지만 한사코 마다하는 것이 아닙니까. 남편이 오면 갈까봐요. 남에게 손 벌리기 싫어하는 유별난 성격인가 싶었습니다. 그때 같은 일본에서 온 친구가 넌지시 말했습니다. 그 역시 일본에서였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을 거라고. 그렇습니다. 남의 집에 온 사람의 불편함, 그것이 바로 이주여성들의 불편함입니다. 그들 역시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글·사진 유성문 편집위원 rotack@lycos.co.kr>

 

출처 :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id=18014&pt=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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