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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미디어 전망대] 우리가 된 그들-을 어떻게 부를까

박옥화 0 1,406 2008.05.08 11:38
[미디어 전망대] ‘우리가 된 그들’을 어떻게 부를까
미디어 전망대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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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영호 부산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류의 책이 인기를 끈 시절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세계화란 우리가 뻗어 나가야 할 넓은 바깥세상만을 뜻했다. 하지만 최근 보도에 따르면 국내 다문화 가족이 100만을 넘어섰다고 하며, 대학 캠퍼스든 걸거리에서든 외국인은 거의 일상화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다인종, 다문화 사회는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가깝게 다가온 듯하다. 하지만 언론 역시 이러한 변화를 수용할 정도로 바뀌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사람들은 특히 익숙치 않은 현상에 대해선 정형화된 틀로 이해하는 습관이 있다. 이는 다른 집단의 특성을 단순화하거나 편의대로 이름을 붙이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언론보도에서도 이런 습관은 심심치 않게 보인다.

예컨대, 국내 프로야구에는 외국 출신 선수들이 적지 않은데, 이들은 대개 ‘용병’으로 불린다(‘프로야구/용병-토종 “대포전쟁”’-서울신문 4월 29일). 프로선수란 원래 돈을 받고 일하다 더 좋은 조건에 자리를 옮겨 다니는 직업인이다. 그런데 왜 외국에서 뛰는 (심지어 외국 국적의) 한국 선수들은 마치 국가의 대표이자 자부심의 상징처럼 묘사되고, 이들만 용병이 되는지 좀 의아스럽다.

어쨌든 이들은 용병이란 용어에 의해 ‘우리’와는 ‘다른 사람’으로 차별화된다. 우리는 정서적 일체감을 갖춘 한 식구이며, 저들은 이국적인 외모에, 돈만 쫓는 냉혹한 해결사를 연상시키는 부정적인 존재이며, 잠시 머물다 떠나야 할 이방인일 뿐이다. 이것은 세계화 시대에 언론이 아직도 외국인에 대해 갖고 있는 편향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국제결혼이나 이주를 통해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된 사람들을 보는 관점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다. 지금은 ‘다문화 가족’이란 완곡한 용어로 불리지만, 언론이 이들은 보는 관점은 동등한 구성원이 아니라 우월한 입장에서 ‘이방인’에게 배려하고 베푼다는 입장에 가깝다. 이들에 관한 기사는 늘 피부색과 외모에 대한 묘사로 시작해 편견 비판, 배려 강조 등으로 이어지는 정서적 접근이 주류를 이룬다.

지난 해 말 베트남 신부 자살 사건 때 각 신문의 사설들은 ‘따뜻함’, ‘관심’, ‘차별 철폐’, ‘편견 타파’ 등 정서적인 단어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한국인이여 베트남 신부 잘 좀 대해 주세요’ 하는 사설 제목(동아일보, 2007년 11월 1일)은 이러한 분위기를 잘 표현해준다. 이는 지금도 이주민 관련 기사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보도태도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온정주의적 접근으로는 이 문제를 낳은 구조적 맥락을 냉철하게 보기 어렵다. 그나마 올해 5월엔 문화일보와 조선일보 등이 다문화 가정과 관련된 사회적 문제점들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특집을 싣고 있는데, 이는 매우 고무적인 변화이다.

싫든 좋든 우리는 이미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문화권 출신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다문화 가족들을 언어나 풍습, 외모의 차이가 아니라 우리와 동등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언론이 타문화나 집단에 대해 편견 없이 중립적이고 합당한 용어를 사용하는 일은 이러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 된다. 뉴욕타임즈나 AP통신 등 해외 유수 언론들이 세세한 지침서를 두고, 소수문화에 관한 기사에서 단어 하나 선정하는 데까지 신경을 쓰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media/28602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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