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필리핀 출신인 초등학교 2학년 준현(가명·9)이는 받아쓰기 시간에 거의 신경질적이 된다. 선생님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받아쓴 문장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다. 맞게 쓴 문장도 자꾸 지운다. 공책이 찢어질 때도 있다. 준현이는 늘 몇 문장을 받아 적지 못하고 빈 답안지를 낸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이주여성 자녀인 지영(가명·8)이와 지혜(가명·9)도 받아쓰기는 낙제점이다.
이주여성 가정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맨 먼저 맞닥뜨리는 것은 '언어 장벽'이다. 한국에서 나서 자랐는데 왜 그런 것일까. 답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환경에 있다.
2005년 전북대 설동훈 교수팀이 전국의 국제결혼가정을 표본조사했다. '자녀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낸다'는 가정은 열 집 중 채 세 집도 안 됐다(27.5%). 한국의 일반 가정의 자녀들은 절반 이상(56.8%)이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을 다녔다.
대부분의 이주여성 가정 자녀들은 학교에 들어올 때까지 한국말을 모르는 어머니와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처지다.
◆언어 장벽 때문에 출발부터 뒤처져
담임 선생님은 "준현이는 수학에 재능이 있는데 수학문제의 지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모든 공부의 기초가 되는 독해에서 뒤처지면 다른 과목에서도 뒤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뒤처지는 언어능력이 다른 과목에도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2006년 당시 한나라당 이주호 의원이 국제결혼가정 자녀들의 기초학력을 분석했다. 이들 대부분은 어머니가 외국인인 아이들이었다.
기초학력에 미달되는 아이가 100명에 7.5명꼴이었다. '기초학력 미달'이란, 다음 학년으로 진학하기 어려울 정도로 학력이 낮다는 것이다. 일반 초등학생 중에는 이처럼 학력이 낮은 학생은 100명 중 1.45명뿐이었다. 다음 학년으로 진급하기 어려울 정도의 학생수가 국제결혼가정 자녀들 쪽이 일반학생보다 5배나 많다는 의미다.
◆정체성 고민…어머니에 대한 부정·무시로 나타나기도
이주여성 가정을 방문해 양육지도를 하는 교사들은 "아이들이 커 가면서 엄마를 부정하는 사례를 많이 본다"고 말했다. 피부색 때문에 어려서 '왕따'를 당했던 아이들이 한국말이 익숙해지면 '엄마 때문에 그랬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연세대 전혜정 교수는 "이주여성 자녀들이 받는 정신적 상처는 엄마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가장(家長)이 사회·경제적으로 '하층'에 속한다는 것 때문에 생기는 부분도 있다"며 "이를 극복하려면 재능 있는 자녀들을 집중 지원해 이들의 성공 모델을 만들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입력 : 2008.05.05 0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