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금산의 한 초등학교 입학생 8명 중 1명만이 부모 모두가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농촌 부녀회장을 외국인 며느리가 맡아 잘 한다는 보도도 심심치 않게 소개된다. 경기도 안산 원곡동은 국제도시를 방불케 한다. 중소기업이 밀집한 지역은 전국 어디든 외국인 노동자들의 집단거주지를 쉽게 볼 수 있다. 거부할 수 없는 ‘다문화사회’의 도래를 실감한다.
우리 사회의 외국인 문제는 한국사회의 ‘끄는 요인’(pull factor)과 외국인 출신 사회의 ‘미는 요인’(push factor)이 만나는 곳에서 발생한 현상이다. 3D업종 취업 기피로 인력난을 겪는 중소기업을 살리는 것이 끄는 요인이라면, 5만원도 안 되는 월급을 받는 나라에서 한국 일자리는 그야말로 황금을 캐는 곳으로 여겨지는 미는 요인이다. 농촌지역의 ‘다문화가족’은 농촌공동화 이후 농촌 총각의 혼인 문제의 해결책이자 가난한 나라의 딸을 ‘제대로’ 살게 하는 터전이다.
초기 산업사회의 인구 이동은 국가 내에서 이뤄졌고 우리의 경우 1960년대 이농현상이 그랬다. 산업화 후기로 오면서 인구 이동은 국가 간의 이주현상, 즉 농업 위주 국가에서 산업국가로의 이동으로 변모한다. ‘시네마천국’이라는 오래된 영화에서 주인공 토토의 친구 가족이 독일로 이민 가면서 그 아버지가 못사는 조국 시칠리를 욕하며 침 뱉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 광부와 간호사가 60년대 독일로 노동이민 간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 시절 독일에서의 3년치 수입은 서울에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채 30년이 지나지 않아 노동이민을 보내던 처지에서 받는 입장으로 바뀐 것이다.
‘때리지 마세요. 우리도 인간입니다.’ 10여년 전 공장 내의 인권탄압에 맞서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던 네팔 노동자의 피켓 문구이다. 이후 많은 종교인, 인권단체의 노력이 2003년 ‘외국인 근로자 고용 등에 관한 법률’ 제정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노동자로서의 권리에 최소한의 법적·제도적 장치는 마련되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외국인 노동자는 여전히 ‘희귀종’ 대우를 받는다. 단군 자손이라는 단일민족 사상은 타 문화에 대한 폐쇄성의 뿌리가 된 듯하다. 이 신화적 민족기원론이 왜 순혈주의 우상으로 둔갑하여 엉뚱한 곳에서 문화적 우월감으로 나타나는가?
그런데 그것도 아닌 듯싶다. 외국인 문제는 이중잣대로 재단된다. 유색인은 백인계와 달리 엄격히 차별받는다. 서구의 백인문화는 여전히 선망의 대상이다. ‘어륀지’형 미국 프렌들리는 세계화시대의 살아갈 방향을 얘기한 예외라 치자. 문화의 서구화를 넘어 외모와 체형까지 서구화를 지향하는 인종적 열등감이 혼재한 것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바로 알아야 한다. 백인 입장에선 흑인이든, 노란 머리염색과 눈 수술한 황색인이든 모두 유색인으로 분류된다.
외국인 노동자, 외국인 며느리에 대한 무자비한 인권탄압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지만 아직도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문화적 야만의 선입견과 편견이 도사리고 있다. 베트남 새댁이 마을 부녀회장이 되어 화합의 중심이 된다는 미담의 한켠에선 베트남 신부 사망 소식이 양국 간 문제로 비화될 정도로 우려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우리는 세계 7위권 경제국가 성장을 목표로 하고, 문화가 경쟁력을 좌우한다며 문화강국을 내세운다. 그 문화강국을 위해 문화산업, 콘텐츠산업 육성을 최우선 정책과제로 삼고 있다. 그런데 아직 2%가 부족하다. 우리 세계관이 얼마나 열려 있는지 먼저 돌아봐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국가 간 일방적 문화거래의 한계는 시들해진 한류 문화상품에서 보지 않았는가. 심지어 역효과로 되돌아오기까지 한다. 정보기술로 상전벽해가 이뤄져도 인간성의 근본은 호혜적인 거래에서 출발한다. 문화는 상거래 이상의 것임을 새겨야 한다.이장섭 한양대 교수·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