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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신부 딘티냔의 전원일기(10)] “한국 사위 왔다” 돼지 잡고 온 동네 잔치

박옥화 0 1,559 2007.11.24 10:10
[베트남 신부 딘티냔의 전원일기(10)] “한국 사위 왔다” 돼지 잡고 온 동네 잔치
Weekly Chosun 주선 딘티냔 가족 베트남 친정 방문
승합차 빌려 친척 20여명 마중, 하노이 공항 눈물의 상봉
베트남 운전기사도 찾기 힘든 오지
취재진이 마을 찾은 첫 외국인
사위가 사온 냉장고 구경하러 동네사람들 모두 몰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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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딘티냔의 친정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앞줄 맨 왼쪽이 아버지 딘휴맨씨, 맨 오른쪽이 어머니 단티환씨다.

베트남 하노이공항은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도 30~40명 가량의 마중객으로 붐비고 있었다. 꽃다발을 들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기자 일행은 딘티냔·김보성씨 부부보다 먼저 입국 수속을 하고 나와 딘티냔의 가족을 찾았다. 손을 번쩍 들고 큰 소리로 “딘티냔! 딘티냔!”이라고 외쳤다. 그러자 공항에 있던 사람 모두 손을 번쩍 들며 베트남말로 화답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딘티냔의 가족이었던 것이다. 원래 40명 넘게 오기로 했다는데 승합차 두 대에 다 탈 수가 없어 20명 정도만 나왔다. 모두 하이퐁 시골집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넘는 길을 달려온 것이다. 이 중에는 오늘 하노이에 처음 와 보는 사람도 몇몇 있다고 했다. 10분 후 자동문이 열리고 딘티냔이 남편 김보성씨, 딸 사랑이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딸을 안고 있는 딘티냔의 얼굴은 빨갛게 상기돼 있었다.


“냔! 냔! 냔! 냔! 냔!”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딘티냔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얼핏 들으면 싸우는 소리처럼 들렸다. 모두 흥분한 나머지 너무 크게 소리를 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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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딘티환씨가 손녀를 안아보고 있다.

딘티냔의 빨간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딘티냔이 제일 먼저 어머니 딘티환씨에게 달려갔다. 가슴에 딸 사랑이를 안은 채 딘티냔은 엄마 품에 안겨 한참을 소리 내어 울었다. 어머니의 거뭇거뭇한 얼굴 위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딘티냔의 아버지 딘휴맨씨는 딸을 안아보기도 전에 취재진에게 악수를 청했다. 딘티냔의 올케가 꽃다발을 가져와 딘티냔에게 안겨줬다. 마중 나온 가족이 딘티냔씨 부부를 빙 둘러쌌다. 김보성씨는 너무 많은 환영 인파에 주눅이 든 듯 아기 기저귀 가방을 든 채 눈만 껌벅거렸다.


공항 구석구석에 있던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에서 유명 연예인이라도 귀국한 줄 알고 다가왔다가 딘티냔을 힐끗 보고 지나갔다. 딘티환씨가 사랑이를 품에 안았다. 태어나 처음 외할머니를 본 사랑이가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사랑이가 울기 시작하자 모두 소리를 멈추고 사랑이의 울음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고맙습니다. 기자 선생님, 너무 고맙습니다.”


Weekly Chosun이 ‘베트남 신부 딘티냔의 전원일기’ 마지막 회를 베트남 현지 딘티냔의 친정에서 진행하고 싶다는 부탁을 하자 딘티냔은 눈물부터 흘렸다. 그는 “열심히 교회에 다녀서 하느님이 마련해주신 선물인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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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입구 상점 앞에서 딘티냔 부부와 아버지·어머니가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대한항공 여객기에서 이제 곧 하노이공항에 도착한다는 기내 방송이 베트남어로 나왔다. 딘티냔은 창밖을 내다보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이 날 딘티냔은 분홍색 원피스에 분홍색 구두를 신었다. 출국 전날 옆집 언니와 함께 미용실에도 다녀왔다.


한국으로 시집갔던 딘티냔이 베트남 하이퐁 고향집에 도착한 날 마을잔치가 열렸다. 딘티냔의 어머니 딘티환(43)씨는 딸이 낳은 딸을 품에 안고 오랜만에 일손을 놓았다. 뜨거운 날씨와 풍부한 물 덕택에 이곳은 5월과 10월, 1년에 두 번 벼를 수확한다. 지금이 한국으로 치면 모내기철인 것이다. 외국인 사위 김보성씨는 말이 하나도 안 통하는 처갓집에서 손짓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그는 한국에서 가져온 고추장과 김치, 라면을 함께 먹자고 했다. 동네 언니들, 친구들이 딘티냔과 그녀의 남편을 보러 놀러왔다. 딘티냔의 집 마당 한가운데 막 포장을 뜯은 냉장고가 한 대 서 있었다. 사위가 처음 처갓집을 방문하며 사 온 선물이다.

친척과 이웃사람들은 모두 냉장고를 보며 사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동해안 쪽으로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에 항구도시 하이퐁이 있다. 이곳에서 다시 북쪽으로 차로 한 시간쯤 가면 베트남 신부 딘티냔의 고향집이 있다. 조금 더 북쪽 해안으로 가면 세계적인 관광지 하롱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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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신부 딘티냔의 전원일기(10)] “한국 사위 왔다” 돼지 잡고 온 동네 잔치
Weekly Chosun 주선 딘티냔 가족 베트남 친정 방문
승합차 빌려 친척 20여명 마중, 하노이 공항 눈물의 상봉
베트남 운전기사도 찾기 힘든 오지
취재진이 마을 찾은 첫 외국인
사위가 사온 냉장고 구경하러 동네사람들 모두 몰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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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딘티냔과 그의 어머니가 딘티냔 부부의 결혼 사진을 보며 웃고 있다.

딘티냔은 열아홉 살 되던 해인 지난해 친구들과 함께 국제결혼업체가 주선한 단체맞선 자리에 나갔다. 딘티냔은 아들 둘, 딸 하나 있는 농사꾼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집안일과 밭일을 하는 시골 처녀였다. 딘티냔의 아버지 딘휴맨(47)씨는 “딘티냔이 어려서부터 총명해 무엇이든 쉽게 배우고 자기 일에는 실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딘티냔은 일찍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도시 구경 삼아, 재미 삼아 친구들과 맞선 자리에 나갔다. 세 번 나가 세 번 모두 알선업체에서 소개해준 남자의 청혼을 거절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던 딘티냔은 결국 한국 남자와 결혼하기로 했다. 매번 한국 남자의 청혼을 거절하던 딘티냔이 김보성씨의 청혼을 받아들인 데는 이유가 있었다.

“가난이 싫었지만 막상 떠나려니 엄마·아빠 두고 한국 가서 살 생각에 막막했어요. 저는 한국말도 전혀 할 줄 몰랐거든요. 한국 남자들은 거짓말도 많이 한다고 들었어요. 자기가 잘사는 사람이라고 같이 살자던 남자 따라 한국 갔다가 울면서 돌아온 베트남 신부도 많다고 들었어요. 우리 남편은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베트남 사전으로 참 열심히 자기소개를 했어요. 이 사람이랑 살면 한국에서도 잘살고 가끔 엄마·아빠 보러 베트남에도 올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딘티냔의 남편 김보성씨는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에 주방기기를 납품하는 공장에서 생산직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김보성씨는 성실히 돈을 모아 결혼 전 경기도 남양주시에 작은 아파트를 마련했고, 아이가 태어나자 자동차도 구입했다. 그러나 200만원이 넘는 가족의 베트남 방문 비용은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딘티냔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단 한 번도 남편에게 베트남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고향집에는 취재진이 잘 곳이 없다는 말에 취재진은 할 수 없이 하노이에서 잠을 자고 이튿날 딘티냔 집으로 출발했다. 하노이에서 하이퐁으로 출발할 때 베트남 운전수에게 딘티냔의 고향집 주소를 보여주자 운전사는 “여기가 어딘지 가 봐야 알겠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노이와 하이퐁을 연결하는 왕복 2차선 고속도로에서 운전사는 수시로 중앙선을 침범하며 등골이 오싹해지는 추월을 감행했다. 주소 체계가 제대로 잡혀있지 않은지 운전사는 여러 번 차에서 내려 인근 주민에게 길을 물었다. 그래도 헤매기 일쑤였다. 길에 잘못 들어서기를 반복한 끝에야 한 시골길로 들어섰다. 자동차가 널 뛰듯 시골길을 달렸다. 끝없이 펼쳐진 논 곳곳에서 베트남 농부들이 베트남 전통모자 ‘논’을 쓰고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누런 소가 찻길을 막고 편안하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운전기사가 동네를 한참 헤맨 끝에 소 주인을 찾아왔다. 안 움직이려고 버티던 소는 가혹한 매질 한 대에 벌떡 일어나 길가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출발, 좁은 논두렁을 만났다. 운전기사는 베트남어로 계속 신경질을 냈다. 위태롭게 논두렁을 지나고 또 한참을 달렸다. 베트남 하노이 출신이라는 운전기사 역시 이런 시골은 처음 봤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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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들이 한자리에서 푸짐한 점심 식사를 시작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다 왔다고 하네요.”


통역을 맡은 향강(여·25)씨가 운전기사가 내뱉은 말을 전했다. 취재 차량이 좁은 길을 지나다 더 좁은 길로 좌회전을 하자 그곳에 딘티냔씨 가족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마을 입구에서 딘티냔 가족이 한 시간 넘게 취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1시 도착 예정이었지만 몇 차례 길을 잘못 들어서는 바람에 오후 2시가 넘어서야 딘티냔의 집 앞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섭씨 39도를 오르내리는 뜨거운 날씨였다. 에어컨 바람이 나오던 승합차에 있다 밖으로 나오니 뜨거운 공기와 따가운 햇볕이 피부에 닿았다. 딘티냔의 아버지, 어머니, 이모, 이모부, 오빠가 차례로 악수를 청했다.  아버지 딘휴맨씨는 올해 47세다. 사위보다 겨우 7살 많다. 딘티냔의 아버지는 농사꾼답게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 사위보다도 몸이 좋아 보였다.


“기자님이 이곳 마을에 온 최초의 외국인이라고 합니다.”


향강씨의 말을 듣고 주위를 돌아보니 그늘마다 마을사람이 모여 취재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사진기자가 들고 있는 카메라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마을 입구에서부터는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길이었다. 딘티냔을 따라 좁은 골목길을 200m 정도 걸어 들어갔다. 딘티냔의 집 마당에 들어서니 점박이 개 두 마리가 그늘에 앉아 혀를 내밀고 있었다. 이 개는 모두 식용이다. 한 마리를 잡고, 다른 한 마리가 새끼를 낳으면 또 한 마리를 잡는 식으로 계속 두 마리씩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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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신부 딘티냔의 전원일기(10)] “한국 사위 왔다” 돼지 잡고 온 동네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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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운전기사도 찾기 힘든 오지
취재진이 마을 찾은 첫 외국인
사위가 사온 냉장고 구경하러 동네사람들 모두 몰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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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딘티냔·김보성씨 부부. 딘티냔이 Weekly Chosun 독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콘크리트로 된 집은 세 채가 있었다. 중앙에 본채가 있고, 왼쪽에 부엌채, 오른쪽에 사랑방처럼 보이는 별채가 있다. 각 건물에 방이 나뉘어 있진 않다. 본채에 세 개의 침대가 세 모서리에 각각 놓여 있다. 공간 구분이 없다. 한 침대는 할머니, 하나는 어머니·아버지, 하나는 이모·이모부가 쓴다. 딘티냔·김보성씨 부부는 딘티냔의 오빠 부부가 사는 별채를 잠시 빌려 쓴다. 이 집에 가장 많은 것은 선풍기였다. 


한국에서 귀한 손님이 왔다며 딘티냔의 집에서 마을잔치가 열렸다. 삶은 새우와 문어, 돼지고기 볶음, 이곳의 주식인 쌀밥이 거실 겸 공동침실 바닥에 길게 깔렸다. 딘티냔의 오빠 딘휴뀌씨가 장롱 구석에서 무거워 보이는 큰 항아리를 뒤뚱거리며 꺼냈다. 그 안에 인삼과 약초로 오래전에 담근 약주가 있다. 한국의 백세주와 비슷한 맛이었지만 뒷맛이 오래 남는 약주였다. 귀한 손님이 올 때만 꺼내는 술이다. 건너편 집 창틀에는 동네 어린이들이 매달려 취재진을 향해 손을 흔들다 카메라를 들면 사라지곤 했다. 아이들은 모두 맨발로 다녔다. 화장실에는 출입문이 없다. 바닥에 구멍 하나가 뚫려 있다. 화장실 옆 헛간 철장 안에 막 병아리 티를 벗은 닭 10마리가 낯선 사람을 보자 큰 소리로 삐약삐약 울었다. 그 옆에는 도축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삶은 새우와 돼지고기 볶음 맛은 일품이었다. 딘티냔의 이모가 삶은 문어를 밥그릇에 얹어주며 결혼은 했냐고 물었다. 고개를 저으니 남자는 결혼을 해야 사람이 된다며 돼지고기 볶음을 다시 밥그릇에 얹어주었다. 이모가 띠를 묻더니 양띠는 돼지띠를 만나는 게 좋다고 말했다.


야채는 모두 싱싱했다. 이곳의 야채는 ‘어쩔 수 없이’ 유기농 방식으로 재배된다. 비싼 비료를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이곳 사람에게 싱싱하다는 의미는 밭에서 바로 따 온 것을 의미한다. 돼지고기, 닭고기도 모두 유기농 방식으로 사육된다. 딘티냔의 어머니는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위해 읍내에 나가 시원한 맥주도 미리 사와 얼음 박스에 넣어두었다.


딘휴맨씨는 사위가 마음에 드느냐는 질문에 “항상 건강했으면 좋겠고, 둘이 진정 사랑한다면 내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답했다. 김보성씨는 음식이 입에 안 맞는지 한국에서 갖고 온 김치를 꺼내 들었다. 취재진과 운전기사, 통역사와 딘티냔의 아버지, 어머니, 이모, 오빠가 함께 밥을 먹는 동안 나머지 식구는 다른 곳에 앉아 우리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손님이 식사를 마친 후에야 이들은 식사를 시작했다. 손님을 지극 정성으로 배려하는 사람들이었다.


딸이 얼마나 보고 싶었냐고 딘티환씨에게 물었다. 그는 “처음엔 딸이 많이 생각났지만 농사일이 바빴다”고만 답했다. 딘티냔의 부모는 1주일에 한 번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읍내 PC방으로 나가 한 시간 동안 모니터 속의 딸과 손녀 얼굴을 보고 온다고 했다. 건강한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많이 초췌해 보였다. 그의 얼굴은 상처가 많은 것처럼 거뭇거뭇했고, 손에는 농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딘티냔은 “엄마 생각만 하면 항상 눈물이 난다”고 했다. 아이를 막 낳고 엄마 옆에 가고 싶었는데 베트남에 가고 싶다는 얘기를 차마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모녀는 벽에 붙은 딸 부부의 초상화를 보며 웃었다. 이 집에는 집주인인 아버지·어머니의 초상화와 딘티냔·김보성씨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딘티냔은 이 집에서 보배 같은 존재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한국에 있는 1만명의 베트남 신부가 모두 베트남 고향집의 보배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고 사는지도 모른다.


딘티냔과 그의 친구 20여명은 지난해 3월 한국인 남편을 만나 결혼식을 올리고 한 달 후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나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은 현재 집을 가출해 도망 다니는 신세라고 한다. 친구들 중에는 잦은 폭력과 베트남보다 훨씬 고된 농사일, 후진국에서 온 신부라는 멸시를 견디지 못했다고 한다. 최근엔 한국 남자와 결혼했다 아이를 낳고 이혼당한 베트남 여성이 씨받이로 이용됐다며 아이를 돌려 달라고 전 남편을 고소하는 일도 있었다. 


‘베트남 신부의 전원일기’를 연재하기 위해 ‘잘사는’ 베트남 신부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전국의 면사무소와 국제결혼업체 등에서 ‘잘산다’며 소개해 준 베트남 신부도 막상 만나 보면  경제적으로 어려운 남편을 둔 베트남 신부가 많았다. 한 베트남 신부는 베트남어 통역사를 만나자 “베트남 집에 돈을 좀 부쳐주고 싶은데 한 푼도 못 보내준다”고 남편 앞에서 목놓아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행복하시죠?” 딘티냔에게 물었다. “네, 행복합니다.” 딘티냔이 대답했다. “왜요?” 내가 다시 물었다. “아이가 건강하고 남편이 건강하고 부모가 모두 건강하기 때문이에요.”  취재를 마치고 떠나는 길에 딘티냔의 어머니가 취재진에게 베트남 커피를 선물했다. 베트남에서 커피는 고급 선물이라고 한다. 어머니의 마음이 무척 고마웠다. ‘깜언(감사합니다)’이라고 베트남어로 감사의 인사를 올리자 어머니가 미소를 지었다. 작은 골목을 가득 메운 딘티냔 가족과 마을사람들은 취재진이 탄 차량이 마을 입구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모두 표정이 밝았다. ▒



/ 하이퐁(베트남) =  글 김경수 기자 kimks@chosun.com
사진 유창우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canyou@chosun.com


 

출처 : 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7/27/200707270087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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