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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없는 폭행

박옥화 0 1,407 2007.11.1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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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없는 폭행
[2007-11-19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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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침, TV를 틀어 놓은 채 소리만 들으며 집안일을 하고 있는 데 뉴스 하나가 들려왔다. “부산의 한 초등학교 수업시간에 반 학생들을 상대로 행동이 ‘나쁜 아이’를 뽑게 한 뒤 해당 학생의 이름을 공개해 일부 학부모가 반발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나쁜 아이로 지목된 학생 중 한 명은 충격으로 닷새째 등교를 못하고 있다니 기구절창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유독 이 기사에 가시 돋친 반응을 하게 되는 건 나 역시 초등학교 4학년 때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어서일 게다. 어느 날 담임이 무슨 까닭이었는지 한 명 씩 일어나 ‘싫어하는 아이’ 이름을 말해보라 하였는데 사람 심리라는 게 딱히 마음에 둔 아이가 있지 않고서야 먼저 이름이 나온 아이를 거듭 지목하기 마련이 아니겠나. 그런 연유로 한 친구에게 표가 몰렸고, 난데없는 봉변을 당한 그 아이가 귀까지 빨개져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모습이 40년이 흐른 지금까지 잊혀 지지 않는다. 힘 있는 쪽이 대항할 여력이 없는 쪽의 감정을 아무 생각 없이 짓밟는 것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것인가. 그런데 이 비슷한 기분을 오락 프로그램에서도 경험했다.

“아들 많이 낳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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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일요일이 좋다>의 새 코너 ‘사돈, 처음 뵙겠습니다’를 보다가 감정이 울컥했다. 한국에서 농촌 총각들과 결혼한 아시아 여성들의 부모와 그들의 사돈을 만나게 해주는 이 코너의 취지는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라지 않다. 하지만 이 코너에서 무심결에 엿보이는 외국인 여성을 ‘내려 보는’ 시선은 보는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첫 회 주인공인 ‘테이’의 부모님을 모시러 베트남에 갔을 때 현지 처녀가 한국에 오길 소망한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처녀의 어머니가 “우리 딸과 결혼하면 아들 낳을 수 있을 거예요”라고 말하자 개그맨 김한석이 한 마디 거든다. “아들 많이 낳을 수 있어요?”라고. 물론 처녀의 어머니가 앞에서 한 말이 있다고는 하지만 ‘인종을 넘어 한 가족이 되자’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 건 ‘사돈 처음 뵙겠습니다’에서 이 말은 반드시 편집했어야 옳다. 우리나라 농촌에서는 이미 외국 신부들을 내 식구로 온전히 받아들였건만, 정작 방송에서 마치 씨받이 취급을 한 꼴이 아니겠나.

그저 다복하란 의미일 뿐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김한석이 상대하는 대상이 재벌가문의 여성이나 인기 연예인이었다면 “예쁜 아이 많이 나으시기 바랍니다”도 아니고 “아들 많이 낳을 수 있어요?”라고 물을 수 있었겠는가. 점점 인적이 끊겨 간다는 농촌에 물설고 낯선 외국에서 한 가족이 되고자 먼 길을 눈물을 뿌리며 온 처녀들이건만, 제작진은 혹시 무의식중에라도 그녀들을 대를 잇기 위해‘수입한’여자쯤으로 여기고 있는 건 아닌지. 행여 그들에게 쌀 한 톨만큼의 우월감을 갖고 있는 제작진이 혹여 있다면 스스로 주의하길 바란다. 이는 외국 여성들이 출연하는 모든 프로그램들이 한번쯤 점검해봐야 할 부분이다.

검색어 1위에 올랐어야 할 것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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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우리가 주목했어야 한 것은 자밀라의 섹시댄스가 아니라 윈터의 호소가 아니었을까?

지난주 KBS <미녀들의 수다>의 경우 첫 출연으로 검색어 순위 1위에 오른 우즈베키스탄 여성 자밀라의 미모에 대한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러나 그날 우리가 주목했어야 할 키워드는 미국여성 윈터가 당했다는 ‘폭행’과 ‘인종차별’이 아니었을까? 강도를 당해 피를 흘리며 병원에 갈 정도로 위급했던 윈터에게 병원이 매춘부 취급을 하며 입원을 거절했다 하니 이게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내 딸 아이가 머나먼 외국 땅에서 저런 분통 터지는 일을 겪었다고 생각해보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프로그램 안에서도 밖에서도 윈터의 고백은 즉시 공론화 되지 못했다.

만약 우리나라 여성이 TV에 나와 윈터와 같은 일을 타국에서 당했다고 털어놓았다면 아무리 김태희 급의 미모를 가진 여성이 함께 출연했다 한들 우리의 관심은 의당 폭행 건에 쏠렸을 게 자명하지 않겠나. 절체절명의 위기를 털어놓았음에도 ‘미안합니다’ 한 마디로 넘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며 윈터는 어쩌면 한 번 더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열한 살 때의 앙금으로 인해 오십이 된 이 나이까지 그 때의 담임을 스승으로 여기길 거부하듯, 우리가 생각 없이 저지른 실례로 의해 외국 여성들이 한국에서 마음에 남을 상처를 얻는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어쩌면 우리는 오히려 그들에게 한국에 대한 마음의 문을 닫도록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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