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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농촌총각 40∼50%가 국제결혼…문화 장벽딛고 2세 가교로 사회 진입

VWCC 0 1,761 2007.03.15 11:41
 
[지역이 먼저입니다(10)] ’그들’을 ’우리’로…’우리’가 끌어안아야 할 ’그들’
 

[쿠키 사회] 경북 농촌총각 40∼50%가 국제결혼…문화 장벽딛고 2세 가교로 사회 진입


가족·지역민 보수성에 여전히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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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양북면 어일2리. 경주시에서 감포 가는 길에 있는, 바닷가가 멀지 않은 볕 좋은 마을이다. 기자가 찾아간 9일, 박삼희씨(55)의 집 별채엔 베트남 아줌마 예닐곱명이 모여 뜨개질에 한창이었다. 아줌마들이라고 해도 아직 20대 초반의 앳된 얼굴들이 대부분이다. 돌 언저리의 아기들은 낯선 손님 앞에서도 눈망울이 똘망똘망했다.


새마을부녀회 경주시협의회 부회장인 박씨가 이웃의 딱한 사정을 가진 베트남 신부를 돕기 시작한 게 불과 2년 전. 당시 6명이던 베트남 신부들은 그 새 34명으로 늘어났다. 2세 만도 17명이나 된다.


이 마을에 외국인 신부가 특히 많긴 하지만, 주로 동남아에서 온 결혼이주여성은 급속하게 농촌 사회의 일원으로 진입했다. 2005년 기준으로 경북지역의 결혼한 농림어업종사자(남성) 1천105명 중 482명이 외국 여성과 혼인했다. 흔히 말하는 '농촌총각' 10명 중 4∼5명가량이 외국에서 신부를 데리고 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우리'로 진입하기까지는 장애가 한둘이 아니다. 양북면의 경우, 베트남 신부들의 '친청엄마'를 자청한 박씨가 있어 그나마 쉬웠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 보면 이들이 아직 '우리' 속으로 완전히 진입은 하지 못하고 있다. '다르다'는 것에 익숙지 않은 지역민들의 보수성은 언어 장벽과 문화 차이가 있는 이들을 여전히 '그들'로 규정하고, 인격적 만남이 전혀 개입하지 않는 결혼 과정은 외국인 신부를 '가족 구성원'이 아닌 '소유물'로 간주하게 만든다. 결혼이주여성이 결혼 후 2년이 지나면 귀화 자격을 얻을 수 있지만, 이들의 한국 국적 취득을 막는 이는 다름아닌 남편이나 시부모이다. 국적을 취득하면 혹 다른 데로 도망갈까 걱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외면한 '농촌 총각들', 그러니까 '우리'가 외면한 '농촌'이 유지될 수 있도록 떠받치고 있는 것이 결혼이주여성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들'은 여전히 '그들'이다.


그렇다고 영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2세들이 '그들'을 '우리'로 편입시키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농촌 사회에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아장아장 걷는 아기들이 생겨나자 지역사회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 마을 이장 부인 김복연씨는 "그동안 초등학교에 새로 입학하는 애들이 없었는데 얘네들이 커서 동네 초등학교에 가게 될 걸 생각하면 기쁘고 또 고맙다"고 말했다.


정일선 경북여성개발원 수석연구원은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적응교육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뿐더러, 교육 프로그램이 있다 하더라도 그 목적이 '통합'이 아닌 '동화'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면서 "이들이 진정으로 지역사회의 일원이 되려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간직한 채 한국사회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역 이주노동자 4만7천여명 추산…절반이상 불법체류 '차별과 무관심'


"코리안드림 실현은 지역 발전 큰 도움"


쑨리강(孫立剛·29)씨가 오른쪽 소매를 걷어올렸다. 15㎝는 족히 넘을 만한 긴 상처가 팔에 선명했다. "이 상처 때문에 아직도 오른팔에 힘이 없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여유있게 웃었다.


쑨씨는 2000년 말, 22세의 불법노동자로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인 중국 옌타이에서 대구에 왔다. 성실하게 일했고, 한국어를 열심히 배웠으며, 돈을 악착같이 모았다. 생각지도 못한 불행이 닥친 것은 2002년 8월. 야간작업 도중 기계가 고장나 팔이 기계에 눌린 것이다. 불법노동자 신분에 치료는 언감생심이었다. 팔이 짓눌리는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일을 못하게 된다는 사실이 눈앞을 캄캄하게 했다.


그런 암담한 세월을 보낸 그가 지금은 당당한 사업가가 됐다. 연매출 6억원의 1인 기업 (유)부원유통의 사장이다. 팔을 다친 후 김경태 목사가 대표로 있는 대구외국인노동상담소의 도움을 받아 산재보험금을 받게 됐고, 5년 미만 불법노동자에게 주는 특별 비자도 받게 됐다. 손을 많이 쓰지 않는 공장에서 일을 다시 했고, 국제전화카드 판매를 하며 돈을 모았다. 2004년 말, 5천만원의 자본금으로 세운 회사가 2년 만에 이만큼 큰 것이다. 고향 산둥성에서 농산물, 그 중에서도 주로 마늘을 수입해 대구시 북구 매천동 농수산물도매시장에 팔고, 경북 농촌의 폐비닐을 중국 고향 마을로 수출하는 일로 그는 당당히 대구·경북 지역사회의 일원이 됐다.


농산물 도매상 등 그의 사업 파트너들은 그가 중국뿐 아니라 대구를 잘 아는 무역업자라는 점에서 그를 좋아한다. 중국에서 품질이 좋은 농산물을 믿고 수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6년여 만에 '코리안 드림'을 멋지게 이룬 그는 오는 4월22일 고향 옌타이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그는 "대구 사람들이 친절하고 좋다"면서 "결혼 후에도 대구에서 계속 사업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달서구 본리동·장기동에 있는 그의 원룸은 '코리안 드림'의 도약과 신혼의 꿈을 이룰 보금자리다.


쑨씨는 정말 운 좋은 사례다. 대구·경북지역에 있는 이주노동자는 4만7천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고, 이 가운데 합법적 체류자는 2만명 정도다. 일자리가 어렵다고는 하지만 '우리' 중에서는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하는 3D업종의 제조업은 '그들'이 있음으로 버텨가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우리'로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다.


10여년째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 상담 활동을 하고 있는 우옥분 대구이주여성인권상담소장은 쑨씨의 사례를 들며 "이주노동자든 결혼이주여성이든 이들이 지역사회에서 제대로 일하고 성공하는 것이 결국은 지역사회에 큰 득이 된다"며 "이들에게 정책적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혜진기자 junghj@yeongnam.com/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출처: 쿠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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