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남성과 결혼한 이주여성에 필요한 것은? '권리' |
차미경, 아시아의 친구들 대표 - 다문화라는 틀 속에서 이주여성의 노동권과 사회권은 실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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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뉴스] 입력시간 : 2007. 11.27. 11:47 |
| 부모교육-'어머니의 노래와 삶'으로 노래를 통해 여성으로서의 어려움과 즐거움을 공유하여 정서적인 지지와 연대감을 갖고자 교육을 진행한다.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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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여성들이 한국으로 시집을 오는 과정이 매매혼이냐 아니냐의 논쟁은 결혼한 여성이 겪는 어려움과 처지에 대한 인식 공감과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혼방식과 그 과정은 당사자 여성들에게 낯설고, 연애나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중매와는 다른 길이었지만, 그들의 선택은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과 바람을 온전히 안고 시작되는 긴 여정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 사진결혼을 통해 하와이로 시집가는 조선의 가난했던 딸들을 배에 태우면서 흘리던 이별의 눈물은 지금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의 공항에서 손을 흔드는 가족들과 친척들로 얼굴만 바뀐 채 이어지고 있다.
갇힌 새와 같은 여성들의 희망사항, 그러나어느새 한국 생활 5년차가 된 수연. 그녀는 한국에 들어와서 한국주부로, 아내로, 며느리로 살면서 현실은 결혼 전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베트남에서 본 한국드라마는 젊은 그녀에게 새로운 꿈을 심어주는 이상의 세계였다.
“드라마를 보면 한국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보였어요. 집도 모두 잘 살고, 남편 시어머니 다 잘해주고, 다 좋아 보였어요.”
지금 그녀는 한 아들을 키우는 엄마이지만 여전히 “내가 아기 키우고 식모처럼 밥만 해주려고 시집왔냐!” 소리치며 남편과 싸우기 부지기수이다.
국제결혼 배우자 대상 국가 중 두세 번째로 꼽히는 베트남에서는 여성이 전적으로 육아와 가사를 책임지지 않는다. 함께 돌보고 일한다는 것이 오히려 보편화되어 있다.
한국 남편은 밖에서 돈을 번다는 이유로 온갖 가정살림과 육아에서 제외된다는 것 때문에 여성들의 불만은 높다. 그런데 이들을 일상적으로 힘들게 하는 것은 그들 존재에 대한 한국 가정의 인식이다.
맘에 들지 않을 때면 시어머니나 남편이 결혼 수수료를 들먹이며, “우리가 너에게 들인 돈이 얼마인데…” 라는 모욕을 주기 일쑤이다.
그런데 정작 이들 여성은 받은 돈이 별로 없다. 한국남자와 중개업소 사람들끼리 주고받은 거래였고 그 사이에 여성들이 끼어 있을 뿐이다.
가정 안에서 익숙해진 무시나 가정부 따위로의 취급은 임금 없는 노동자생활의 한 부분이다. 용돈 몇 천원으로 일주일을 지내는 수많은 여성들은 지금 이 순간 말도 생각도 통하지 않는 집 안에 갇혀 있는 새와 같다.
결혼 이후의 여성의 삶이란 남자들이 좀 달라졌다 해도 힘든 과정이며 도전이다.
극복하던(참는 것으로 보통 말한다) 헤어지는 것, 길은 둘 중 하나이다. 하물며 나이 차이와 생활 문화, 관습의 차이로 인한 어려움에 무시까지 일상화되어 있는 국제결혼 여성들은 날아가고픈 새처럼 가출과 이혼을 수없이 생각한다.
조금 나은 경우의 여성들이라면 가정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꿈을 꿔본다.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은 가정 밖에서 사회적 인간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본능적 바람과 더불어,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친정 식구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시집간 딸들의 희망사항 때문이다.
결혼이민자 여성들, 보이지 않는 비정규 바다에서한국말이 조금씩 가능해진 여성이민자들이 일을 찾아 나설 때 이들과 정식으로 노동계약서나 근로계약서를 맺은 경우는 주변에서 흔치 않다.
필리핀 이주여성처럼 영어가 가능하여 어린이를 가르치는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하루 임금 노동자가 된다.
같은 나라에서 온 친구나 한국에서 맺어진 친척, 동네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되어 찾아가는 일터는 꽃을 화분에 담는 일부터 공장 한 구석에서 앉아 방금 막 기계에서 나온 상품을 포장하는 일, 인쇄소 잡일, 청소, 주유소 세차까지 노동이 필요한 모든 곳들이다.
물론 사회는 이들이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도 않는다.
“친구 따라 처음에는 갔는데 그 다음부터는 화원 사장님이 직접 전화해요. 일 있으니 나오라구요. 아침 9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하고 3만원 받았는데 어떤 날은 3만5천원도 받았어요.
종이에 사인 같은 것 한 적 없어요. 근로계약서가 뭐에요? 그냥 사장님이 알아서 돈 줘요. 한국 사람은 얼마 받는지 몰라요. 하는 일은 비슷해요. 한국 사람들과 일하면서 말도 거의 안 해요.”
그나마 월급을 받는 친구들이 있다면 이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공장에서의 노동자로서의 현실은 이들에게 아직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가사노동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저 용돈 벌이에 도움이라도 되면 좋겠다는 이민자 여성들의 바람은 근로계약서 한 장 없이 필요로 하는 곳곳에서 싼 가격으로 거래된다.
아시아 여성들을 대하는 시장 안에서의 사고방식은 지금까지 이주노동자들을 더 싸게 사용하려는 시장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 오히려 여성이기에 자본주의 시장은 더 헐값으로 이들의 노동력을 이용한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아시아계 이주여성들의 노동현실이 관심 밖에 놓여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들이 소수자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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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여성을 대상으로 한 정부의 정책은 사회서비스 사업의 기조를 기본으로 한다. 사회적 서비스 성격을 지닌 적응교육 프로그램들은 올 해 만에도 각 부처가 위탁과 프로젝트 지원의 형식으로 시민사회 안에서 수없이 시행되었다.
더 많은 여성들이 근본적으로 겪을 수 있는 불평등한 노동조건, 육아문제, 사회적 권리를 개선하는 정책과는 상관없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소수들을 대상으로 많은 정부 예산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안에 외국인 500만 시대가 올 것이라며 이제는 다문화 다인종 사회로 나가야 한다는 지식인들의 주장은 이미 눈앞에 놓인 현실이다.
그런데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리 안에서 이주여성의 이주와 결혼에 근본적인 이유가 되는 빈곤의 근본적 원인과 이들이 한국 노동시장에서 다른 유형으로 착취의 피해자가 되고 있는 현실은 가려져있다.
그래서 문화적응과 편견이 없는 시민사회의 모델이 이주여성의 당면 문제를 해결할 것처럼 결론을 맺는다.
이주노동자들이 지금까지 하층계급처럼 대우를 받으며 살아왔듯이 몇 년 안에 더 많은 여성들이 가정 밖에서 노동을 할 때 이들은 또 다른 착취의 대상자로 전 업종에 걸쳐 이용될 것이다.
가정부처럼 대우해도 마음의 미안함 조차 없던 아시아 이민자들에 대한 인식은 시장에서 임금을 덜 줘도 되는 대상으로 취급될 것이며 이로 인해 이들은 비정규직의 가장 밑바닥에서 일을 하는 여성노동자가 되어 갈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문화와 다양성을 담론화하는 지식 전문가들과 정부가 정작 이주여성들에게 손짓하는 비정규직의 고용구조, 싼 거래의 임금노예시장과도 같은 노동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더 심각하게 이들의 인권을 남용하는 이데올로기의 확산이란 생각이다.
노동권과 인권을 실현하는 사회운동이 필요하다이주노동자와 이주여성들을 위한 사회적 서비스를 확대하는 배경에는 그 필요성과 더불어 그동안 이들의 문제를 드러낸 사회단체, 인권단체들의 인권현실에 대한 운동의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자적으로 실천운동을 통해 인권의 목록을 개발하고 개척해야 할 사회운동의 소명이 최근 ‘지원과 위탁’이라는 정부 정책과 만나면서 정체성이 묘연해지고 있다.
국가가 이들의 적응과 자녀 교육 문제, 사회보장까지 고민하는 것은 시민들이 누려야 할 공공성 확대를 위한 책무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주운동은 사회운동의 전망과 정부의 역할에 대한 구별지점이 없는 경로로 나아가고 있다.
정부의 이주사업은 정부가 공무원의 일자리를 더 늘려서 정부 공공영역에서 해결해야 할 부분이지 위탁이나 프로젝트의 효과성에 따라 결정해 갈 사안은 아니다.
이주자들의 평등한 사회적 권리를 인권의 영역에서 실현하려는 운동은 독자적이며 자율적인 사회운동의 지향점을 갖고 발전해 가야 한다.
이주지원 사업 주체들이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그 법안을 통과시키는 정부의 기본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해도, 만약에 몸을 담고 있는 영역에서 여성이민자들을 위한 운동을 사회적 서비스와 다문화 이해라는 틀 안에 가둔 채 한 발 더 나아가지 못한다면 이주여성들의 노동권이 가려진 장막 안에서 소외가 되는 과정에 일조하게 될 수도 있다.
이들의 노동권과 사회적 권리를 옹호하고 방어하는 운동의 주체로 나서지 못한 채 인권현실을 드러내는 수준에 항상 운동의 시계 바늘은 멈춰 있을 수 있다.
그동안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한국 사회의 편협했던 인식이 평등한 노동권을 가진 주체로 인식하는 운동으로 변화되었듯이 이주여성 인권의 발전을 위한 운동과정 속에는 노동권의 평등한 실현을 위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한 전제로 정부의 역할과 사회단체의 역할을 구별하며 거리를 두는 것이야 말로 이들을 한국식으로 귀화시키고 동화시키려는 방식에 대항하는 출발점이며, 정부 지원의 수혜자로서의 이주여성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고 노동하며 사회적 권리를 평등하게 누려야 할 모든 이주여성들을 위한 인종차별 없는 운동과 계급운동의 연대이기도 하다.
몇 년 안에 이들이 더 많은 숫자로 비정규직 노동자층 안에 편입될 것은 자명하다. 그 때 이들과 연대할 수 있는 정신적 근거는 지금부터 준비되어야 한다.
<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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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미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