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땅에서 베트남신부 한명이 죽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남편한테 폭행도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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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폭행을 더 이상 못 참고 한 젊은 베트남 임산부가 아파트의 9 층 베란다에 창문의 커튼을 잡고 내려는데 중간에서 커튼이 떨어져.........
시댁고향에서 베트남신부가 끔찍하고 고통스럽게 죽었어요, MBC방송이 그 신부의 이름 Trần Thị Thu An(Lê Thị Kim Đồng)이고 껀터(Cần Thơ) 거더 터이흥에 거주합니다. 시댁을 가출 실패한 5일후 2007년 04월 30일에 마지막 숨을 잊어버렸어요.
어제 Tuổi trẻ (젊은 신문)기사는 불행한 베트남신부의 껀터에 거주하고 있는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가족의 보여주는 엘범에는 Kim Đồng사진이 몇 장 밖에는 없습니다. 그 사진이 결혼식에 찍힌 귀한 사진입니다, 그 사진 안에 신부가 참 아름답고 남편 옆에서 참 행복하게 보입니다, 그 신부가 너무 젊은 21살이에요.
컨터도 거도시 터흥면 그 아가씨 집에 들어가는 길에 풀이 많고, 집이 많이 없습니다.
건넛집처럼 가난합니다. 결혼하기 전에 농사가 잘 안되어서 집에 빚이 6,000만동 있습니다.
우리(=기자)가 김동씨 집에 들어가는데 윈티회님 (김동씨의 어머니) 혼자서 집에 있었습니다. 원티회님은 향을 꽂고 인사를 했습니다. 레광탕님(김동씨의 아버지)은 새벽 일찍 일하러 나가셨고, 집에서 논까지는 거리가 멀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김동씨 집에 들렀을 때 레광탕님(김동씨의 아버지)께서 집으로 오셨습니다.
김동씨는 4남매입니다. 그 중 몇 명은 결혼하고 나머지는 학교에 다닙니다.
“딸이 죽었을 때 하도 많이 울어서 지금은 눈물이 말랐습니다. 딸애가 박복했던 것이지요.
가난해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딸이 한국에 시집을 갔습니다. 한국남자와 결혼하면 우리도 도와주고, 딸도 행복하게 살 줄 알았습니다.”
윈티회님 (김동씨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며 울었습니다.
한국남성와 결혼하려고, 김동씨는 맞선을 보려고 호치민시에 갔습니다. 김동씨는 예쁘니깐
한국남성에게 인기가 많았을 것입니다. 결혼식은 바로 이루어졌고, 다른 3쌍과 같이 했습니다. 담생(베트남지역) 결혼식장에 2006년 9월 13일에 결혼식을 했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처갓집에서는 300달러를 받고, 결혼사진도 1장만 받았습니다.
그 후, 신부는 다시 고향에 가서 서류를 만들고,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2007년 1월 14일 김동씨는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6일 뒤에 다시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한국에 온지 1개월이 되었는데 동씨가 300달러를 베트남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처갓집을 고쳤습니다.
그 다음에 비극이 생겼습니다.
남편이 김동씨를 집에 혼자 두고, 밖에서 문을 잠그고, 외출을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많이 폭행했습니다. 잠자리도 밤새도록, 남편 마음대로 강제로 했습니다. 김동씨는 정신적으로 엉망이었습니다.
“우리 딸이 울면서 자주 전화가 왔습니다. 사위가 딸에게 잘못해줍니다. 딸이 외출하려고 하면 못가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딸이 또 울면서 전화 와서 울다가 이야기 조금하다가 전화를 끊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위가 목욕하는 동안에만 전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레광탕님(김동씨의 아버지)이 말씀했습니다.
윈티회님 (김동씨의 어머니) 말씀
“죽기 전에 우리 딸이 베트남으로 5번이나 전화했지만 전화를 못 받았습니다. 우리 딸이 저에게 할 말이 있었을 텐데, 그날 비가 많이 오니까, 전화 소리를 잘 못 들었습니다. 딸이 또 전화 올 까봐 전화기 옆에 있었지만, 더 이상 딸은 전화가 없었습니다. ”
Mr Thắng는 우리 딸이 2007년 04월 25일에 투신 상처 때문에 뇌에 출혈이 많은 상태로 대구 가톨릭 대학병원으로 옮기고 5일 후 04월 30일에 병원에서 이 세상 떠나갔고, 그런데 05월 08일까지 주한베트남대사관이 저한테 전화로 제 딸이 죽었다고 소식을 알려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까지 Kim Đồng가족은 이사건의 정보를 정확하게 아직 모릅니다, 우리 딸이 왜 죽었는지? 언제 우리 딸의 시신을 받을 수 있는지?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합니다, 그래서 딸의 추모식에 참석하러 못 갔습니다. 우리가족이 양국가의 각 관련기관에게 대책을 기대했는데 3개월 지나갔어도 아무 결과 소식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Mr Thắng(Kim Đồng의 아버지)는 딸의 살려 달라 아버지! 제가 남편한테 폭행도 당했다고 할 때 눈물을 흘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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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8월 19일에 오후 한국 사람과 베트남 사람들이 천안역에서 불운한 후인마이의 추모식에 많이 참석하였습니다.
후인마이의 추모식에 참석해주신 분들은 김기수 (천안외국인 노동자센터의 사무국장), 이총민 (이화여성 병원의 국제부인회 공대위 위원장), 및 베트남 신부들과 함께 후인마이의 추모식에 참석하고 모금활동으로 후인마이의 가족을 도와줍니다.
특히 천안에서 황매(Huỳnh Mai)신부의 사건을 접한 후속 공동대책위원회는 06월 17일에 설립되었습니다. 공동대책위원회의 목적은 모금행사로 Huỳnh Mai의 가족에게 도와줍니다, 그리고 대책을 수립하고 한국에서 이주여성에게 도움을 주거나, 결혼이주여성들이 한국사회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
2007년 7월 10일 프로그램 “PD수첩” (이 프로그램은 한국에서 유명합니다. MBC방송에 베트남신부의 죽음이야기가 뉴스 났습니다)
MBC방송으로 신부 이름 “TRAN THI THU AN=짠티투안" (MBC방송에 짠티투안씨인데 김동씨로 이름 나왔습니다.) 신부가 임신 중이었고, 시댁가족들이 신부를 학대해서 신부가 자꾸 가출 하려고 했습니다.
2007년 4월 25일 밤 12시 대구의 한 아파트에서 투안씨가 가출 하려고 했는데, 아파트 엘리베이터에는 CCTV가 있으니까(남편이 알까봐, 추측임), 9 층 베란다에서 커튼을 매고 밑으로 내려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묶어놓은 커튼이 풀어져서 떨어졌습니다. 많이 다쳤습니다. 그래서 병원구급차에 실려서 병원에 갔습니다. 금동씨는 2007년 4월 30일에 죽었습니다.
기자 : DIEP - OAN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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