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모임에서 만난 결혼이주여성들에게 자녀 교육에 대해 묻자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한국말에 서툰 이들은 자녀가 늦게 말을 배울까 봐 걱정이다. 아무리 경제 사정이 빠듯해도 한국 아이들보다 1, 2년 먼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보낸다.
지난해 결혼이주여성이 낳은 자녀가 5만 명을 넘어섰다. 2010년에는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매년 결혼이주여성 자녀는 20%씩 증가하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미미하다. 성인이 된 후 한국에 정착해야 하는 이주여성과는 달리 이곳에서 태어나서 자란 자녀들은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사회적응 문제는 이제부터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부터 급증한 국제결혼을 통해 태어난 아이들이 본격적으로 취학 연령에 접어들고 있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상당수 이주여성의 자녀들은 한국어 능력이 부족해 교과 내용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가 숙제와 준비물을 챙겨 주지 못해 학습 준비가 소홀한 경우도 많다.
그나마 초기 이주세대인 조선족 어머니를 둔 아이들은 집에서 한국어를 접할 기회가 있지만 지금 학교에 들어가는 아이들은 동남아시아 출신 어머니가 압도적으로 많아 공부에 더 큰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더 심각한 것은 다른 외모, 문화, 말씨로 인해 느끼는 심리적 소외감이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이주여성 자녀 5명 중 1명꼴로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소외감은 정체성 혼란으로 이어져 스스로를 ‘한국인도 외국인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느끼는 자녀가 40%를 넘는다.
필리핀 출신 어머니를 둔 K 군은 지난해 말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외가의 나라’로 떠났다. 그는 피부색이 다르고 성적이 뒤처진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아 왔다.
K 군의 어머니는 “아이가 친구들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너 필리핀으로 가’였는데 정말 가게 됐다”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K 군이 다니던 초등학교는 이주여성 자녀의 비율이 40%를 넘지만 이들을 위한 별도의 학습지원이나 상담 프로그램은 없다.
전국 822개 광역 및 기초 자치단체 산하기관 중 이주여성 자녀 대상 교육을 실시하는 곳은 10%에 지나지 않는다. 2006년 여성가족부, 교육인적자원부, 노동부 등이 내놓은 ‘여성결혼이민자 가족의 사회통합 종합대책’은 이주여성 본인의 한국 적응을 지원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담당부처 공무원들은 “신학기마다 이주여성 자녀 통계를 조사하는 데도 예산과 인력이 빠듯하다”고 말한다.
한 초등학교 교사는 “학교는 이들을 맞을 준비가 전혀 안 돼 있는데 모든 책임은 학교에 떠넘겨져 있는 상태”라고 지적했다.
지금과 같은 이주여성 자녀의 증가 속도라면 장차 ‘○○○계 한국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이들은 10∼20년 후 가족, 결혼, 노동 시장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이주여성 자녀들이 사회의 다양성을 키워 주는 ‘거름’이 될지,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는 ‘시한폭탄’이 될지는 우리의 손에 달렸다. 이들을 위한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한국이 뿌리 깊은 순혈주의에서 벗어나 글로벌 시민으로 성장하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
정미경 교육생활부 차장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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