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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이주여성들을 보면 자꾸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박옥화 0 1,512 2008.01.02 14:28

"이주여성들을 보면 자꾸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이주여성들의 대모' 이종민 이화여성병원장
[ 2007-12-27 10:0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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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엔 영광 땅엔 평화’. 예수 그리스도가 낮고 천한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주기 위해서일 겁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주여성들의 대모, 이종민 천안 이화여성병원장.1985년 천안에 산부인과를 연 이 원장은 여자들의 몸 속만 들여다보지는 않고 맘 속도 보는 의산데요. 먼 타국으로 시집와 어렵게 살아가는 이주여성들에게 상담자이자 선생님, 때로는 어머니, 큰 언니이기도 합니다. 냉대와 차별로 향수병을 앓는 사람이 있으면 고향에 보내주고,학교에서 따돌림 당하는 코시안 아이들을 공부시키고,구박하는 남편,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화해시키기도 합니다.

‘이주여성들을 보면 자꾸 어머니 생각이 난다’는 이종민 이화여성병원장을 12월 24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한국으로 시집 온 이주여성들의 친정어머니 역할 도맡아


▶ 이화여성병원은 산부인과 위주로 진료하는 곳인가요?

네. 산부인과가 주로 있고요. 여성들에게 특히 많은 유방이나 갑상선 질환이 많기 때문에 유방질환을 담당하는 선생님, 갑상선 질환을 담당하는 선생님, 위내시경이나 여성들에게 많은 소화기 질환 담당하는 선생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 천안에 이주여성 환자분들이 많이 계신가요?

저희가 이주여성을 포함해서 노동자로서는 1만명 정도 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데요. 결혼을 하신 분들이 한 380쌍 정도 되는 것으로 파악이 되고 있습니다.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추세인데요. 그 중에 임신을 하셔서 저희 병원에 다니시는 분이 50-60커플 정도 되시는데요. 물론 이미 낳으신 분들은 빼고 현재 출산을 앞두고 왔다갔다 하시는 분들이 그 정도 되는데요. 이주여성들이 결혼을 해서 오신 분들도 계시지만, 또 천안에 통일교 재단이 상당히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 구라파쪽에서 오신 분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 그래서 병원에 가면 형형색색의 30개국 정도의 국기가 밖에 걸려 있다고요.

네. 저희 병원에서 분만한 분들을 기념해서 그 나라의 국기를 걸어놓았습니다. 저는 못 갔지만 저희 남편과 아이들은 중국 지사에 근무했었는데, 그 때 외국에서 우리나라의 국기를 보니까 굉장히 반갑고 좋더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분들도 외로울 때 국기라도 보면 좀 위안이 되지 않을까 해서 쭉 게양을 했는데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 이화여대 의대를 나오셨는데, 천안에 처음 병원을 여신건가요?

네. 제가 워낙 고향이 온양이거든요. 온양이 천안과 가깝기도 한데, 온양으로 가면 남편이 출퇴근이 어렵겠더라고요. 그래서 출퇴근이 가능하면서 고향에 가까운 곳이 어디일까 생각을 한 곳이 천안이었습니다. 그렇게 자리를 잡았는데 어느덧 만 23년이 되가네요.

▶ 남편께서는 대림산업에 근무하시죠.

네. 대림산업 석유화학부문 대표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 그럼 주말부부이신가요?

제가 거의 출퇴근을 하고요. 당직을 하거나 할 때는 천안에 있습니다.

▶ 이주여성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저희 병원에 임신을 했다든지 어디 불편하셔서 오시다 보니까 그 분들 말씀을 들어보면 딱한 사정들이 참 많더라고요. 맨 처음 시작된 것이 17년 전이었던 것 같은데요. 그 때는 이주해서 오는 여성이 적었기도 했지만, 시가에서의 인식이 지금과 비교하면 너무 안 좋았어요. 마치 무슨 하녀를 데려온 것 같이 그렇게 생각들을 하시니까 너무 사정이 안돼서 제가 개입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맨 처음에는 이 분들이 버티고 살려면 시어머니나 남편되시는 분들한테 제가 친정어머니로서의 역할이 필요하겠다고 생각돼서 처음에 그런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요. 나중에 하다보니까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인 문제도 많이 생기더라고요.

예를 들면 어느 날에는 새벽에 자살한다고 약 먹고 실려오는 분들도 있고, 말이 잘 안 통하고 본인이 기대했던 것만큼 이 곳의 환경이 좋지 않으니까 견디다 못해서 자살소동도 벌이고, 실제로 자살한 분도 계시고요. 이러다 보니까 아무래도 제가 보호자로서 아니면 친정부모 역할을 해주면 그 분이 살아가는데 조금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역할을 떠맡게 되었습니다.

▶ 어느 정도 고통스럽길래 그렇게 자살까지 이르는 경우도 있을까요?

우선 경제적인 것도 상당히 어렵고요. 아무래도 농촌지역이 어렵게 살다보니까 그런 분들도 있고, 도시에서도 조금 형편이 어려우신 분들이 동남아에 계신 분들과 결혼하는 경우가 조금 더 많습니다. 물론 굉장히 여유가 있는 분들도 계시지만요. 그러다 보니까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고요.

또 두 번째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마치 내가 돈을 주고 산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세요. 물론 요즘 안 그런 분들도 굉장히 많습니다만 그런 분들도 계시고, 또 그렇지 않더라도 의사소통이 안 되니까 굉장히 소외되는 느낌, 아마 우리도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말도 안 통하는 곳에 가서 살면 굉장히 외로울 텐데, 그렇게 대화가 안 되고 언어가 안 통하니까 굉장히 외로울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그런데다가 병원을 찾아올 때는 여러 가지로 힘든 상황에서 오시게 되거든요. 몸이 아프다든지 임신을 했어도 입덧도 있고 유산기도 있고 하는 이런 과정에서 병원을 찾아오시게 되니까 여러 가지로 서러운 상태에서 오게 되죠. 그 때 남편이 말이라도 따뜻하게 해줄 수 있으면 좋은데 말도 안 통하고, 친정을 갔으면 좋겠는데 형편이 어렵다고 보내주지도 않으니까 아마 이래저래 자살이 고려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이주 여성분들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나요?

있습니다. 아까 자살소동을 벌였다고 했던 분도 필리핀에서 상당히 가수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분이었어요. 뵈니까 외모도 굉장히 멋있고, 남편되시는 분도 굉장히 멋있게 생기셨어요. 그 정도에 계셨던 분이니까 한국에 올 때는 상당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사치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라고 기대를 하고 왔는데 삶이 그렇지가 않으니까 못 견디는 부분도 있어서 여러 번 상담을 했는데 결국은 자살로 그렇게 마감이 되었어요.

◇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적응 실패하는 부부 많아

▶ 더군다나 임신을 하면 친정생각이 더욱 간절할 텐데요. 이주여성분들 중에 시댁에 들어가서 함께 사시는 경우가 많습니까?

농촌에서는 시댁살림을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시집살이를 심하게 하신 시어머니가 시집살이를 더 시킨다’는 말이 맞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는데요. 그랬던 시어머니분도 오랫동안 만나니까 그 시어머님이 지금은 정말 좋으세요. 많이 이해해주시고 바뀌시는 것 같아요.

▶ 적응을 못하는 것에 대해서 남편분들의 문제도 있을 것 같은데요.

우리나라가 아직까지는 옛날 가부장적인 문화가 많이 남아 있잖아요. 그러니까 아내가 우리나라 음식을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거든요. 보도 듣도 못한 음식인데요. 그러면 그걸 같이 거들면 좋을텐데 못한다고 타박만 하시니까 주눅이 들어서 더 못하는 분들도 있고요. 그렇게 당하다 당하다 나중에는 남편한테 달려들게 되죠.

특히나 필리핀 이주여성분들은 남편분보다 학력이 높은 경우가 굉장히 많거든요. 그러니까 자기가 당했던 만큼 남편한테 상당히 무시하는 태도를 취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조금 더 결혼초기에 잘해주시면 오히려 대학을 나온 여성이라도 남편이 자신보다 학력이 낮아도 굉장히 존중하고 현명하게 살림하는 분들도 굉장히 많거든요.

그래서 처음에 만남을 어떻게 만드는가가 상당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인이든 한국인이 아니든 상관없이 그런 첫만남을 잘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처음에 한국에 와서 적응하는 기간이 당연히 어려울테니까 그 때 도움을 주시면 이 여성이 이미 능력이 있기 때문에 나중에 그 능력을 발휘할 시점이 왔을 때 남편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으로 돕고 자기 능력도 잘 발휘하고 아이들도 잘 키우거든요. 저희 모임에서 보면 정말 훌륭한 아내들이 많습니다.

▶ 이주여성들에게 건강만이 아니고 가정사, 정신 건강에 대한 카운슬러가 다 되셨어요. 예를 들어 입덧이 심한 며느리의 경우, 시어머니에게 “친정에 좀 갔다가 몸 좀 추스르고 다시 오게 하면 좋겠네요.”라고 하면 시어머니들께서는 어떻게 반응을 하시나요?

지금은 보내십니다. 그런데 한 10년 전만 해도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웠거든요. 항공료가 그 때 경제사정으로는 비싼 비용이라 못 보내니까 처음에는 상당히 아주 매정하게들 거절하셨는데, 지금은 “너무 입덧이 심해서 이러다 사람 놓치겠어요.”라고 하면 보내주시기도 하고 남편도 거기에 대해서 상당히 이해를 해주시는 편입니다.

지금은 옛날에 비해서 참 우리나라 사람들이 역시 빨리 뭐든지 마음먹으면 잘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주여성을 잘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습득하고 실행하시지 않나 기대는 합니다만 아직은 다양성에 대해 인정해 주고 배려해주는 면에서는 조금 부족하죠.

▶ 이주여성들의 진료비와 치료비는 어떻게 하시나요?

한 2년 전까지는 진료비가 없으신 분들은 저희가 받을 수 없었어요. 이주여성들은 남편분이 계시기 때문에 괜찮은데, 노동자로 온 분들 중에 심지어는 자궁외 임신이라든지 자궁내 출혈 때문에 수술을 해도 도저히 수술비를 낼 수 없는 형편인 분들은 어쩔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십몇 년 고생을 했는데, 한 2-3년 전부터는 정부에서 다 지원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그 점이 아주 감사하죠.

▶ 이주여성들을 위한 ‘국제부인모임’이 있다고요?

제가 진료를 해야 저희 직원들도 있고 병원도 운영을 하니까 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가 없어서 3년 전부터 정식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그동안은 그냥 비정기적으로 만났었는데, 이 모임에서 멘토링 사업을 하는 거죠. 그래서 먼저 이주해 온 여성들한테 새로 오신 분들 중에 문제가 있는 분들을 연결을 해주고, 보통 한 분한테 세 명을 엮어 주었어요. 그래도 정 해결이 안 되면 저한테 연락을 하게 해서 자체적으로 해결이 되도록 해봤는데, 그러다보니까 거기서 문제가 생기는 것도 좀 있고 잘 안되는 부분도 있어서 저희가 아예 ‘국제부인모임’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도움받는 것만 하지 말고 우리도 도와주는 것을 해보자고 해서 바자회 등을 통해 수익금이 많지는 않지만 그 수익금 나오는 것으로 아프리카의 잠비아나 남미의 페루에 보내드리기도 하면서 우리가 서로 나눈다는 것을 같이 느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했는데 의외로 굉장히 좋아하세요.

자기네 고유의 음식을 해 와서 팔기도 하고 나눠 먹기도 하고, 또 친정 부모님이 오시면 같이 오시기도 해서 상당히 즐거운 시간도 갖고요. 또 김치를 담가서 같이 나눠 가기도 하는데요. 처음 2년은 인원이 많지 않아서 매달 모임으로 했습니다. 그러다가 복지사를 정식으로 채용해서 만2년 정도 복지사가 열심히 활동하고 있어서 지금 매주 모여서 실생활에 필요한 것들, 은행 이용법이나 아이들 학교 가는 것, 학교 가기 전에 미리 가르쳐야 할 것 등 실제적인 것을 하니까 도움이 된다고 많이들 얘기하시는데요.

지금 목표는 내년 3월에는 아무래도 아이들이 어휘력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아이들을 위한 육아시설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 지금은 경제적인 부담이 조금 있어서 소망만 갖고 있습니다.

▶ 아직은 인권이나 복지보다는 친선목적이 더 많은 건가요?

복지 쪽을 지금 상당히 많이 하고 있습니다. 친선을 넘어서 복지 쪽으로 많이 하고 있는데요. 복지 문제를 다른 단체와 연계해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는데요. 그 부분은 지금 저희의 가장 큰 숙제입니다.

▶ 성공적인 가정모델도 많이 있죠?

그렇죠. 실제로 문제있는 가정보다 성공적인 가정이 더 많습니다. 결혼 초기에는 우리나라 사람끼리 결혼해도 얼마나 두 분이 살아가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그래서 적응한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이주여성들도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하고 한 1-2년 정도만 뒤에서 잘 도움을 주면 그 다음에는 잘 살아가거든요.

그래서 저희 부인회에 오시는 분들이 한 30여분 정도 되시는데요. 거의 대부분 아주 잘 살아가고 계시거든요. 그리고 남편분들도 바쁘셔서 자주는 못 오시지만 가끔 만나면 아주 만족하시고 아내가 참 훌륭하다고 칭찬하시고, 아이들도 엄마들 모임에 오면 서로 언니, 누나, 형 하면서 잘 어울려 놀거든요. 아이들이 밝게 잘 크고 있습니다. 다만 걱정이 아이들이 어휘력이 조금 떨어지니까 학교에 가서 우리나라는 성적이 굉장히 중요한 나라인데 그 점이 좀 떨어질까봐 제가 할머니로서 좀 걱정이 되는 거죠.

▶ 베트남 여성들은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내나요?

베트남은 가톨릭을 열성적으로 믿고 있어서 거기에 대한 인식은 굉장히 잘 되어 있는 것 같아요. 또 필리핀은 워낙 기독교 문화가 잘 되어 있더라고요. 우리는 그 동안 별로 지내지 않던 할로윈 데이라든가 이런 성축제가 필리핀에서는 굉장히 잘 되어 있고요.

◇ 어렵게 6남매를 키우신 어머니의 꿈... 장학 재단의 설립


▶ 이 원장님처럼 남을 많이 도와주는 분들은 부모님의 영향을 받은 경우가 많으시던데요. 이 원장님은 자랄 때 어떠셨나요?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온양에서 태어나서 아버지가 공무원을 하셨지만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6남매를 대학교육 시키느라고 지문이 없어질 정도로 일을 하셨거든요. 그래서 굉장히 고생을 많이 하셨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주려고 굉장히 많이 노력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상담사의 역할이라든지 나중에 돌아가신 다음에 보니까 참 훌륭하셨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6남매를 가르치느라 경제적으로 어려우셨기 때문에 저희를 가르칠 동안은 다른 사람에게 장학금 같은 것을 줄 수 없으셨지만 말년에는 꼭 장학재단을 만들었으면 하시는 것이 당신 꿈이셨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조금이라도 제가 이루어 드렸으면 하는 것도 있고요.

또 제가 초등학교는 온양에서 다니다가 5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왔는데 와서 보니까 저는 완전히 촌놈이잖아요.(웃음) 촌놈이 다니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그러면서 자기가 어려운 형편에서 학교를 다니다 보니까 아무래도 저절로 어려운 분들한테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대학 다니면서는 진료봉사활동을 다녔는데요. 지금의 용산 전자시장이 옛날에는 청과물시장이었거든요. 거기에 개천이 있죠. 그 개천 뚝방에 수사님 한 분이 결핵환자들을 모아놓고 계셨어요. 길에서 얼어 죽지 않도록 그냥 수용만 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거기를 토요일마다 진료를 가면서, 잘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은 했었는데요. 아직까지는 제 삶이 바빠서 제대로 못하는 부분도 꽤 있습니다. 그 때 좋으시고 훌륭한 분들을 만난 것이 평생의 자산인 것 같아요.

▶ 어머님이 6남매를 키우는 어려움 가운데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싶어하신 것을 보면, 교육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셨던 것 같아요.

굉장히 대단하셨어요. 당신이 과부로서 자식 공부 가르치기가 너무 어려우니까 다른 사람들도 홀로 사시는 어머니나 아버지들이 얼마나 어려울까 하는 부분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 하셨거든요. 크지는 않지만 제가 지금까지 해온 장학금을 줄 때도 홀어머니나 홀아버지의 자녀들을 주로 대상으로 했습니다.

▶ 지난 해 필리핀 보건복지부 장관을 초청해서 필리핀 이주여성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아주 눈물바다가 되었다면서요?

국가를 부르면서 막 우시는데 굉장히 마음이 안 좋더라고요.

▶ 이런 교류를 자주 하시는 것은 필리핀 분들이 한국에 와서 살고 있지만 당신의 조국이 당신들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겠죠?

그런 것도 있고요. 또 저희가 그 분들의 친정 동네에 진료를 가기도 하거든요. 그러면서 당신들이 이렇게 훌륭하게 키워서 따님을 우리나라로 보내 주었기 때문에 우리도 당신들에게 뭔가 되돌림을 해드리고 싶다, 같이 나누고 싶다고 해서 같이 가서 진료도 하고 약도 그 곳에 놓고 오는데요. 우리나라 약이 좋다고 아주 여러 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지난 여름에 베트남 여성 후안마이 씨가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죠. 그 당시 대책위원장을 맡기도 하셨는데요. 어떤 사연이었습니까?

갓 스무 살이 된 베트남 아가씨가 결혼을 해서 한국에 들어왔는데, 들어온 지 두 달 만에 남편한테 살해를 당해서 시신으로 발견이 되었거든요. 그런데 무려 18군데가 골절이 된 상태에서 발견이 되었습니다. 죽기 전 날 써놓은 편지를 보면 자신은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남편도 충분히 이해를 하고 남편 미워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쓰여 있었는데요.

그런데 그 남편 되시는 분이 일용직으로 일하시면서 경제적으로도 굉장히 어렵고, 전화도 끊어놓고 아내를 가둬놓은 채로 살았던 거예요. 그러니까 그 여성이 누구에게 도움도 청할 수 없고 얼마나 어려운 형편에 있었겠어요. 그런 상태에서 살해당한 것을 생각하니까 참 마음도 아프고 그 부모의 마음은 또 어떨까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희가 추모제를 하면서 경찰당국에 적극적으로 범인을 잡아달라는 요청도 했는데요. 잡고 보니까 남편도 그동안 굉장히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고 저는 직접 보지 못했지만 경찰에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이 사건이 죽은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살인자가 된 남편도 굉장히 불행한 사건인 것 같아요. 그래서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중개소를 통한 상업적인 결혼이다 보니까 서로에 대한 이해가 너무 적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앞으로도 외국여성들이 계속 결혼을 해서 올텐데 이런 제도는 빨리 시급히 정부에서 철저하게 관리를 하고, 결혼을 해서 오는 여자분이나 결혼을 하는 남자분도 그 점에 대해서 교육도 미리 잘 해서 이런 사건이 재발되지 않아야 여자든 남자든 모두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노인복지를 위한 재단도 설립... 코시안 문제를 해결을 위한 사업도 계획

▶ 이화여성병원에 직원분들은 몇 분 정도 계시나요?

70여명 정도 됩니다.

▶ 아까 말씀 들어보니 직원들이 원장님을 무서워한다고요.

병원이라는 곳이 특히 산부인과는 조금만 정신을 다른 곳에 팔면 사고가 나거든요. 분만이라는 과정이 보통 분들 생각에는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 같지만, 굉장히 위험 부담이 많거든요. 호르몬의 상태를 보면 우리가 막 140Km로 달리다가 갑자기 멈추는 것과 똑같거든요.

열 달이라는 임신기간 동안 그 임신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몸이 그 쪽을 향해 달려가다가 갑자기 분만이 되면서 태반이 떨어져 나가고 호르몬이 갑자기 확 돌아서 유턴을 해줘야 하거든요. 그러다보니까 거기서 사고가 많이 납니다. 그래서 저희 병원의 미션 중에 하나가 완벽(Perfect)인데요. 물론 인간에게 완벽한 것은 어렵지만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병원은 그렇지 않으면 정말 치명적인 것이기 때문에 요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낙태금지, 모유수유 같은 원칙을 지키신다고 들었습니다.

병원은 아기가 태어나는 곳이니까 좀 더 성스러운 곳에서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고요. 그래서 저희 병원에서는 낙태는 하지 말자, 좀 더 아기들이 축복받은 탄생을 했으면 하는 뜻에서 안 하고 있고요. 저도 처음부터 안 했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했었는데 그것이 늘 양심의 가책이 되었고,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저에게 그건 안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당부도 있으셨어요.

그래서 이건 당신의 유언이기도 하고 제가 하나는 지켜야겠다는 생각으로 낙태를 안 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좀 어려웠어요. 저희 병원을 쭉 다니시다가 낙태 안한다고 하면 다른 병원으로 가셔야 하는 경우도 있고, 또 거절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상처받으시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또 경제적으로 사실 조금 어렵기도 했지만, 안 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모유수유는요. 저도 모유수유를 다는 못했습니다. 큰 아이는 한 달을 했고, 작은 아이는 못했는데요. 그 모유수유를 하면서 아기와 엄마가 기가 통한다는 것, 그것이 아기가 안정감을 갖고 자기가 태어났을 때 이 세상에서 나를 전적으로 받아들여준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데 아주 중요한 것 같아서 모유수유를 꼭 하도록 권고해 드리고 있습니다.

▶ 이주여성들의 문제도 있습니다만, 코시안(Kosian), 2세 문제도 많이 지적되고 있는데요.

제가 가끔 저희 국제부인회에 속한 분들의 가정 방문을 해보거든요. 가보면 물론 아주 깔끔하게 잘 해놓고 계신 분들도 계시지만 대개는 아무래도 형편이 좀 어려운 분들이 많아서 아이들이 공부하기에 너무 열악한 환경에 있는 경우가 있어요. 아버지들은 아이가 공부를 안 한다고 아이들 탓을 하시는데, 나중에 제가 아버지 혼자 계실 때 “이 환경에서는 나라도 공부를 못한다, 어떻게 공부를 할 수 있겠는가”하는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지금 저희가 꿈꾸고 있는 것이 주택개량사업을 어느 단체에서 한다면 저희가 이런 분들에게 도움을 주어서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이라도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그런 꿈이 있습니다.

▶ 이종민 원장님의 하시는 일을 보면 저희들로 하여금 나눔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서로 나눌 때만이 행복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나눈다는 것이 무조건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눠 갖는다는 거잖아요. 우리가 주고받고, 어느 기회가 되면 주기도 하고 또 받기도 하고, 어느 부분은 주고 있지만 어느 부분은 받는 부분도 많기 때문에 나눈다는 것이 참 좋은 아름다운 단어이고, 거기서 얻는 것도 대단히 크다는 생각을 늘 느끼며 살거든요.

▶ ‘희정노인복지재단’도 준비하고 계신다고 하던데요.

희정재단은 저희 부모님의 성함의 가운데 글자를 따서 제가 만든 것인데요. 부모님의 뜻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장학사업을 했으면 하는 뜻도 있고, 또 제가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신 것을 보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이 몸도 편찮은 상태로 지내면 참 어렵겠다는 생각으로 이 분들에게 어떤 시설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을 했는데요. 지금은 워낙 노인 복지에 관한 법률이 내년에 발효가 되기 때문에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마음먹었던 것이 14년 전 이야기인데 지금 준비를 해서 재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주간복지를 하고 있는데요. 제가 옛날에 하던 병원 주위가 상당히 빈곤층들이 많이 사시는 곳이라서 거기에 계신 어르신들을 모셔서 낮에 돌봐드리고 저녁에는 모셔다 드리고, 이주여성들을 위한 사업을 그곳에서 같이 하는데 지금은 이주여성들이 어르신들을 돌보는 것을 배워서 나중에 취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같이 묶은 것이고요.

두 번째는 이주여성들의 아이들을 누군가 돌봐주어야 엄마들이 일도 할 수 있고 직업을 가질 수 있으니까 보육시설이 필요한데요. 어르신들이 오셔서 무료하게 계시지 말고 그 보육시설을 어르신들이 같이 돌봐주시면 1, 3세대인 할머니와 아이들이 서로 사랑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같이 연계해 보려고 합니다.

▶ 남편분은 대림산업의 CEO로 계신데요. 이 원장님께서 하시는 일 때문에 부부싸움 하신 적은 없으신가요?

제가 아내로서는 너무 많이 부족하거든요. 직업인으로서는 괜찮은 점수를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내로서 어머니로서는 굉장히 부족한 편인데, 거기에 대한 전폭적인 이해가 아마 오늘까지 제가 이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래서 남편이나 딸, 아들에게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부모님을 본받아서 좋은 생각을 갖고 잘 자라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아이들 자랑 좀 해주세요.

큰 아이는 건축학을 하고 있는데요. 코넬대 5학년을 다니고 있는데 오늘 돌아옵니다. 작은 아이는 대학 졸업하고 지금 특전사에 가 있는데요. 가서 아주 군대 생활을 보람있게 적극적으로 하는 것 참 고맙게 생각하고요. 가끔 아이들 생각하면서 마음이 굉장히 따뜻해지고 감사한 마음이 절로 솟습니다.

▶ 이 방송을 들으시는 분들께 크리스마스 메시지 좀 전해주세요.

저희가 주님을 영접하는 크리스마스인데요. 그런데 멀리서 찾지 마시고 내 옆에 있는 남편, 아내, 아이들, 내 직장에 계신 동료들이 다 예수님이신 것 같아요. 저희한테는 환자분들이고요. 그 분들한테 최선을 다 하는 것, 그것이 예수를 잘 영접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어떻게 보면 개인적인 시간이 없으셔서 본인에 대한 회의나 후회가 들지는 않으셨는지요.

저 자신은 굉장히 잘 살아왔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언제라도 불러 가시면 후회없이 떠날 것이라고 저희 아이들에게 항상 이야기를 하는데요. 남편이나 아이들, 가족들과 지낸 시간이 너무 적어서 그 부분은 조금 아쉬워요. 제가 2010년까지는 열심히 병원을 어느 정도 수준에 올려놓고, 그 다음에는 남편과 아이들과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겠다라는 생각을 해요.

저희 친정어머니도 그렇고 시어머님도 돌아가시고 나니까 같이 지낸 시간이 너무 적어서 굉장히 아쉽고 마음 아팠거든요. 그런 후회는 또 하지 말아야겠다고 지금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10년이 되면 또 무슨 계획을 세워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겠지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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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

※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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